-목차-
이민수, 계약하다.
이민수, 고딩 되다.
이민수, 스타 되다.
이민수, 계약하다.
커튼 사이로 내리쬐는 강렬한 태양의 빛. 눈이 부시다.
‘역시, 잠이 부족해.’
이불을 끌어 머리끝까지 덮으려는 순간.
“안 일어나!”
“10, 10분만.”
벗기려는 자와 뺏기지 않으려는 자의 사투는 허무하게도 벗기려는 자의 승리로 돌아갔다.
퍽!
어깨로 전해지는 강력한 충격과 날카로운 목소리.
“내가요. 당신 같은 놈을 낳고도 미역국을 처먹은 년이거든요. 신경 돋우지 말고 좋은 말할 때 일어나라.”
“아이 참. 엄마!”
“밥이라도 얻어먹고 싶으면 빨리 기어 나와!”
이름 이민수.
나이 27세.
직업은··· 좋은 말로는 취준생, 그냥 하는 말로는 백수. 고만고만한 지방 4년제 대학에 입학하고 친구 놈의 사탕발림에 넘어가 해병대에 동반지원해서 개고생. 대학 졸업 후, 다단계와 보험판매 한 달씩이 유일한 사회생활. 유일한 장점이자 단점은 만사태평이라는 긍정적 마인드. 그래서 언젠간 되겠지, 이 희망은 버리지 않는다.
“엄마, 만원 만.”
“없어.”
“그럼 오천 원은?”
“죽을래? 나가서 알바라도 해.”
찬바람을 날리고 방으로 사라지는 엄마의 뒷모습.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공무원인 아버지의 정년이 2년 후로 다가오니 걱정이 많으신 거겠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민수야. 일루 와봐.”
“어.”
민수에겐 믿을 사람이 아직 한 명 남았다. 강아지 꼬리 흔들 듯 쪼르르 달려갔다.
“누나 왜?”
“교통카드 충전하고, 남은 건 용돈으로 써.”
5만 원짜리 두 장이 손에 쥐어졌다. 역시 일류대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다니는 사람이라서 그런지 통이 컸다.
“누나 쌩유. 나중에 백배로 갚을게.”
“기죽지 말고.”
“난세에 영웅이 나오는 법, 난 때를 기다리는 중이야.”
남들이 기다리는 주말은 민수에겐 고통의 시간이었다. 엄마와의 신경전은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벼룩도 낯짝이 있다고 아무 말씀도 없으신 아버지, 천사 같은 누나를 보기 솔직히 미안했다. 그래서 주말은 항상 밖에서 보낸다.
‘이젠 정말 알바라도 찾아야 하나?’
자신감이 죽은 건 아니지만, 언제까지 엄마와 누나에게 손을 벌릴 순 없었다. 눈에는 온통 알바생 고용 광고만 어른거렸다. 그동안 알바를 하지 않은 이유. 자신감을 잃고 그 생활에 안주하지는 않을까, 이게 전부였다. 더는 버티기 힘들다는 것을 가장 잘 아는 사람 또한 민수 자신이었다.
‘뭐야. 저 인간.’
횡단보도 맞은 편. 찌는 더위에도 파란색 양복과 구두, 파란 넥타이, 파란 모자로 온통 도배한 사내가 싱긋 웃는다. 신호가 바뀌고 횡당보도를 건너는 동안에도 파란색으로 처바른 사내는 건널 생각이 없는지 꼼작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끼이익!
찢어질 것 같은 타이어 마찰음. 신호를 무시하고 빠르게 돌진하는 승용차 한 대. 타이어가 아스팔트와 마찰하면서 흰 연기가 솟구친 승용차의 속도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몸을 급히 날려봤지만, 승용차는 코앞까지 다가온 상태였다.
“젠장!”
너무 늦었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아직 죽긴 싫은데. 민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민수 씨.”
나지막한 음악만 들릴 뿐, 주위는 조용했다. 차와 부딪히고도 남을 시간, 그러나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는다. 아마 죽었을지도.
“이민수 씨.”
죽으면 저승사자가 찾아온다지? 한쪽 눈을 조심스럽게 떴다.
“여긴?”
분명 횡단보도를 건너다 사고를 당했다. 그런데 이곳은 횡단보도가 아니다. 탁자에 놓인 커피 한잔, 그리고 파란색으로 떡칠했던 사내가 앞에서 흐뭇하게 웃는다.
“하, 죽은 게 분명하군.”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분명 이 커피는 기억을 잃게 하는 것이겠지. 그리고 저 입구가 저승으로 가는 문이고. 그래. 부모님과 누나에겐 미안했지만, 이번 생은 어차피 가혹할 뿐이었어.
“전 이 커피를 마시겠습니다.”
심호흡을 내쉬고 식은 커피를 단순에 비웠다. 이번 생, 미련은 없었다.
“이제 저 문으로 나가면 되는 건가요?”
“지금 뭐하세요?”
“기억을 잃게 하는 커피, 마셨다고요.”
“좌우지간 드라마가 문제야.”
절레절레 고개를 흔드는 파란색 사내는 A4지 종이 한 장을 탁자에 올렸다.
“사인할지 말지 결정하세요.”
“고용계약서?”
민수의 눈이 번뜩 빛났다. 그리고 곧 실망이 밀려들었다. 고용계약서란 제목을 빼곤 흰 공백인 종이. 조건도 기간도 갑과 을도 없는 백지.
“이게 뭡니까?”
“고용계약서라고 쓰여 있지 않습니까?”
그제야 주위를 살폈다. 손님들과 종업원들도 보이는 것을 봐선 커피숍이 틀림없었다.
죽은 게 아니었어.
이곳으로 어떻게 옮겨졌는지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죽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렇다면 더더욱 이런 말도 안 되는 계약엔 사인을 할 수 없었다.
“장난합니까?”
“그럼 사인을 안 하겠다는 거죠?”
“하하하, 어떤 미친놈이 이런 계약서에···.”
으악!
민수의 입에선 고함이 터졌다. 바로 횡단보도. 차를 피하기 위해 공중으로 몸을 던졌지만, 차와의 거리는 30cm도 되지 않았다. 운전자의 놀란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민수 씨의 몸은 10m가량 날아간 뒤에 떨어집니다. 안타깝게도 머리부터 떨어져서 즉사하고요. 고통은 크게 느끼지 않을 겁니다.”
“이, 이게 뭡니까?”
“잠시 묶은 시간이 곧 풀립니다. 그것은 곧 시간이 별로 없다는 뜻이기도 하고요. 저 그냥 갈까요?”
민수의 입이 심하게 떨렸다. 이 자의 말처럼 사람들과 차의 움직임은 모두 멎어있었다. 아직은 죽을 수 없었다. 아니 죽고 싶지 않았다.
“한다고! 사인하면 되잖아!”
“그럼 사인 먼저?”
뛰는 가슴이 영 진정되지 않았다. 언제 커피숍으로 다시 돌아왔는지는 알고 싶지도 않았다. 민수는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제목만 달랑 적힌 고용계약서에 자신의 이름을 큼지막이 적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럼 이민수 씨와의 고용계약은 성사된 것으로 알겠습니다.”
장소를 마음대로 이동하고 시간까지 멈추는 사내. 지금도 어안이 벙벙했다. 친구 놈들에게 이런 얘기를 하면 미친놈 취급받기 안성맞춤. 혼이 빠진 얼굴을 한 민수는 입만 벌린 채로 맞은편 사내만 바라봤다.
“자, 이젠 한식구가 됐네요. 궁금하신 거 있으신가요?”
“제가··· 뭘··· 어떤··· 월급···.”
입이 심하게 떨려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이런. 많이 놀랐군요. 처음엔 다들 그럽니다. 그럼 제가 설명하죠.”
멍한 눈으로 입을 벌린 민수는 고개만 끄덕거렸다. 귀신 잡는 해병 출신도 이런 상황에선 나약한 인간일 수밖에.
“민수 씨는 앞으로 죽어서는 안 될 자를 원상회복시키는 일을 하게 될 겁니다. 그 임무를 맡게 되면 민수 씨는 타인의 삶을 살게 될 거고, 임무를 완수해야만 본인의 삶을 다시 살 수 있습니다. 월급은 당연히 없습니다.”
“손···가락···.”
“손가락만 빠느냐고 묻는 건가요?”
일반적인 회사가 아니란 건 모르지 않는다. 그래도 사람을 부리면 돈은 주는 게 당연지사. 민수는 고개만 끄덕거렸다.
“임무가 한 번씩 끝날 때마다 기억과 경험이 남을 겁니다. 그게 돈보단 남는 장사일지도 모릅니다.”
민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기억과 경험보단 돈이 필요했다.
“아참. 마지막으로 하나 더. 임무를 거부하면 아까 그 횡단보도로 다시 돌아가게 될 겁니다. 그리고 펑! 우린 계약위반을 중범죄로 보거든요. 그럼 파이팅!”
그리고 사내는 사라졌다. 커피숍에 홀로 남은 민수는 고개를 떨궜다.
“어디를 쏘다니다 이제 들어오는 거야!”
그리고 등으로 전달되는 엄마의 강력한 손바닥 타격. 아무런 고통도 전달되지 않는다.
“나 들어가 쉴게.”
평소와 다른 모습에 민수의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민수, 너 어디 아파?”
“괜찮아.”
“저녁은?”
“생각 없어.”
지구가 망해도 밥을 거른 적은 없었다. 엄마의 걱정스러운 시선을 뒤로 하고 방문을 닫았다. 모든 게 꿈만 같았다.
“이건 절대 현실일 수가 없어.”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타인의 삶, 본인의 삶. 알아들을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그래. 잠시 개꿈을 꾼 거야.”
손으로 뺨을 후려치고는 심호흡을 깊게 내셨다. 앞으로 열심히 살 것을 다짐하려는 순간.
띠링.
한 통의 메시지. 민수의 손이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입사를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무운건투를 빕니다.>
“사실이었어?”
횡단보도에서 사고가 났던 것도, 파란색으로 도배한 녀석을 만난 것도, 황당한 계약서에 사인한 것도. 책상에 앉은 민수는 망부석이 되었다.
띠링.
발신처가 적히지 않은 또 한 통의 메시지. 민수는 무의식적으로 메시지를 눌렀다.
<첫 임무 축하합니다.
이상혁 16세, 역삼동 진달래 아파트 102동 17층. 22시 38분.>
“그래서 나보러 뭐 어쩌라고?”
신경질적으로 삭제버튼을 눌렀다.
으악!
단발의 비명과 함께 민수의 몸은 다시 시간이 멈춘 횡단보도로 옮겨져 있었다. 계약위반을 중범죄로 취급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가려고 했다고요. 막 옷 입으려고 했는데.”
눈을 질끈 감았다.
띠링.
메시지 소리에 감았던 눈을 떴다. 다시 돌아온 방. 안도의 한숨을 내쉬곤 메시지를 눌렀다.
<다음엔 시간이 움직입니다. 주의하세요.>
“에이 씨···.”
민수는 급히 자신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과도한 스트레스에서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욕이라고요.”
될 대로 되란 생각에 민수는 급히 집을 나섰다. 10시 38분까진 1시간도 남지 않았다.
“엄마.”
2개 층을 더 올라왔다. 계단과 연결된 창문을 열고 벽에 쭈그리고 앉았다.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물을 손으로 훔쳤지만, 멈춰지지가 않았다. 집에서 기다리는 엄마를 한 번 더 보고 싶지만, 그럼 용기가 나지 않을 것 같았다.
방법은 이것밖에 없다.
신발을 벗어 가방 옆에 가지런히 놓았다.
쉬고 싶다.
편안하게 쉬고 싶다.
그래서 죽고 싶다.
스스로 주문을 외워 본다.
그리고 체념하게 된다.
떨리는 손으로 창문 난간을 잡고는 한쪽 발을 끌어올리기 위해 힘을 줬다. 창문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땀과 눈물을 식혀준다.
심장이 쿵쾅거린다. 밑을 내려 볼 자신은 더더욱 없었다. 속으로 하나 둘을 외치고는 몸을 앞으로 숙였다.
“이 자식이!”
“어어.”
누군가에게 끌어내려지는 느낌을 받고는 정신을 잃었다.
“아이 씨, 대가리 아파.”
끌어내린 녀석이 몸을 덮치며 바닥에 머리를 부딪쳤다. 잠깐 멍한 정신을 추스르고 녀석부터 찾았다.
“이 자식, 이거 어디로 튄 거야?”
가방과 신발은 그대도 있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창문으로 밑을 바라봤지만, 녀석은 없었다. 그래도 첫 임무는 완벽히 성공했다.
“쉽네.”
미리 시간도 알려주고, 죽지만 못 하게 하면 되는 거니까, 어려운 것은 없었다.
“상혁아!”
계단 밑에서 들리는 목소리. 메시지의 이름이 이상혁이었지. 자식을 구했다는 것을 알면 사례비라도 주지 않을까, 일말의 기대심이 생겼다. 계단을 뛰어오르는 40대 중반의 여인은 그 녀석의 엄마일 게 분명했다. 민수는 정중한 자세로 그 여인을 맞았다.
“저, 아드님은···.”
“상혁이 너 여기서 뭐하는 거야?”
그리고는 민수를 와락 끌어안았다.
“저, 아주머니.”
“정신 좀 차려. 이 녀석아!”
이게 뭐지? 내가 왜 신발도 안 신고 있지? 그리고 이 교복은 뭐야?
여인은 계속 민수를 붙들고 울었고 민수는 지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눈만 굴렸다.
“내가 고딩이 된 거야?!”
현실은 가혹했다. 민수는 여인을 붙들고 닭똥 같은 눈물을 쏟아냈다.
이민수, 고딩 되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고 절망했다. 키 184에 몸무게 75, 나름 근육질이라고 자부했던 몸은 온데간데없었다.
“하, 스머프 이 새끼.”
파란색으로 도배한 놈이 옆에 있다면 죽이고 싶었다. 타인의 삶을 산다는 게 이런 뜻이 숨겨져 있었을 줄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삐쩍 마른 몸에 170cm도 안 되는 작은 키. 어디하나 내세울 건 없었고, 그런 몸 곳곳엔 퍼런 멍으로 가득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멍자국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아 씨, 아프네.”
왜 이상혁이 자살을 선택했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친구도, 선생도, 부모도 도와줄 수 없다는 절망감과 절박함. 어쩌면 자살은 이상혁이 생각할 수 있는 마지막 도피처였을지도 모른다.
“미련한 새끼. 죽을 생각이었으면 몇 놈 보내버리고 가든지.”
민수는 샤워기가 뿜는 강한 물줄기에 머리를 가져다댔다.
“젠장, 뭘 어쩌라는 거야?”
임무만 주어줬지 뭘 어떻게 하라는 말은 없다. 민수의 한숨은 물줄기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사내자식이 저렇게 나약해서 어디에 써먹어?”
“당신은 왜 말을 꼭 그렇게 해요?”
“당신이 애를 싸고 도니까, 그러는 거잖아.”
“많은 걸 바래요? 평소에 관심 좀 가져주면 되잖아요.”
“내가 한가한 사람이야? 집구석이 이러니 되는 일이 없지!”
거실에선 큰소리가 오갔다. 얼핏 봐도 50평정도 되는 아파트. 강남에 이 정도 아파트라면 제법 산다는 집이겠지.
“지금은 내 코가 석자다.”
비록 눈칫밥을 먹는 백수 신세라도 하루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어떻게 돌아갈 수 있는지는 민수도 알지 못했다.
“이상혁, 네가 죽어선 안 될 사람이고, 널 원상회복시키면 난 돌아간다 이거지. 스머프 이 개자식.”
혹시나 하는 생각에 눈을 질끈 감고는 실눈을 떴다. 여전히 이상혁의 방. 임무를 받은 이상, 욕을 해도 횡단보도로는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앞으론 넌 스머프야, 개자식아.”
하루라도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려면 이상혁이 처한 상황과 절망을 해결해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선 이상혁에 대해서 알아야 했다. 있는 집안이라서 그런지 책상엔 최신형 고급 노트북이 놓여 있었다. 화면을 들어 올리자 비밀번호를 입력하라는 창이 나왔다.
“장난해?”
작은 창에 껌뻑거리는 커서만 바라볼 뿐, 자판을 두들길 엄두가 나지 않았다.
- flslwl2003*
“뭐?”
- flslwl2003*
분명 이 방엔 혼자뿐이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머리에 떠오른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그리고 화면은 메인으로 넘어갔다. 지금 이 상황, 우연은 절대 아니다. 상황을 먼저 해결해야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너 누구야?”
- 형은 누구세요?
머리에서 울리는 앳된 목소리. 시간도 멈추고, 스머프와 계약도 하고, 이젠 말도 안 되는 상황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너 이상혁이지.”
- 네. 그런데 어떻게 된 거에요?
“어떻게 되긴 자식아. 난간으로 뛰어내리려는 널 구하려다 새 된 거지.”
- 죄송해요. 그럼 전 죽은 건가요?
“인마. 죽는 게 쉬운 일인 줄 알아? 누가 널 꼭 구하라고 하더라.”
- 그럼 전 어떻게 되는 건가요?
“그걸 내가 알면 이러고 있겠냐?”
노트북을 살폈지만, 너무도 깨끗했다. 아무래도 자살을 결심하고 하드를 포맷한 것 같았다. 방법은 직접 듣는 수밖에 없었다.
“야, 이상혁.”
- 네.
“지금까지 있었던 일, 하나도 빼지 말고 전부 다 말해봐.”
이상혁의 구구절절한 얘기가 머릿속에서 들렸다. 때로는 한숨 짓고 그걸 가만히 놔뒀냐고 화도 냈다. 울먹이는 이상혁을 다독거리며 민수는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밥은 먹고 가야지.”
“별로 생각 없어요.”
하루라도 빨리 문제를 해결하고 원래의 모습을 찾으려는 민수에겐 밥은 중요하지 않았다. 대충 얘기는 모두 들었다. 해병대 출신의 깡다구로 밀어 붙일 생각에 민수는 마음이 급했다.
“오늘 엄마가 학교에 가 볼까?”
신발을 신던 민수가 뒤를 돌아 상혁의 어머니를 바라봤다.
“저, 어머니. 학교에 자주 찾아오는 것도 보기 안 좋습니다.”
“상혁이, 너 왜 그래? 말투에 존댓말까지.”
“에효. 그냥 그렇게 아세요. 절대 찾아오지 마시고요.”
“알았어. 그리고 이건 오늘 용돈.”
5만원이 눈앞에서 살랑거렸다. 하루에 5만원이면 한 달이면 150만원?
이런 미친. 아무리 있는 집 자식이라도 이건 아니었다. 거절하고 싶었지만, 민수는 돈의 위력 앞에 고개를 숙였다.
“그럼 앞으로도 요긴하게 잘 쓰겠습니다.”
정해진 월급도 없고 아들 목숨을 살려주는 일인데, 이 정도의 수고비는 당연할 수도. 민수는 따라 나서겠다는 상혁이 어머니를 겨우 뜯어 말리고서야 집을 나설 수 있었다.
“야, 너 아직 있냐?”
- 네.
“너 하나 보고 사신다. 잘해 인마. 그리고 이 5만원 내 수고비야. 불만 없지?”
- 불만은 없는데, 그거 없으면 안 될 텐데요.
민수는 그 뜻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
“젠장, 졸지에 고삐리 신세라니.”
지긋지긋했던 고등학교 시절. 공부는 적성에 맞지 않았다. 일진은 아니었지만, 맞기 전에 패라는 신조로 일진도 건드리지 못할 깡다구는 가지고 있었다. 지방 대학에 합격했을 때, 기적이 일어났다고 놀라던 담임의 얼굴이 떠올린 민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푹 쉬었다.
- 형. 쟤들이에요.
“누구, 저 다섯 명?”
- 네. 가운데가 제일 악질인 황범수고요.
교실 문 앞에 짝다리를 집고는 실실 쪼개는 다섯 놈. 한눈에 봐도 양아치 냄새가 폴폴 풍겼다.
“야, 이상혁. 졸라 빠진 새끼, 빨리 안 튀어 와!”
민수는 고개를 치켜세우고 한 손을 흔들었다.
“어이, 친구. 나 불렀냐?”
민수의 행동에 어이가 없는지 눈을 아래위로 부라린 놈들이 당장에라도 튀어올 것처럼 씩씩거렸다.
“존만한 새끼가 약을 잘못 처먹었나. 어디서 센캐 흉내를 내? 찐찌버거 새끼가.”
은어의 변천은 그 시대상을 말한다. 그래도 너무 빨리 변하는 통에 번역이 필요했다.
“상혁아, 번역 좀 해봐라.”
- 센캐는 센 캐릭터, 찐찌버거는 찐다 찌질이 거지를 뜻하고요.
“하, 이 양아치 새끼들.”
“뭘 혼자 중얼거려, 존만아. 다굴 당하기 싫으면 빨리 튀어와라.”
황범수란 양아치 놈이 이젠 강아지 부르듯 손을 깔딱거렸다. 지금은 판단이 중요하다. 이상혁의 이 몸으론 다섯 놈을 상대하는 건 무리다. 그래도 변화를 주기 위해선 선빵이 중요했다. 체력이 따라주지 않은 깡다구는 자살행위와도 같았지만,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선 이 방법밖엔 없었다.
“상혁아. 죽진 않겠지만, 아주 많이 아플 거다. 죽으려고 했는데 이 정도는 참아라.”
- 네? 네.
얼굴에 미소를 한가득 안고 천천히 가운데 황범수를 목표로 걸었다. 이상혁의 몸으로 힘을 실어봐야 큰 타격은 주기 힘들다.
선빵, 단 한 방.
거리를 확인한 민수는 오른손 주먹에 온 힘을 집중했다.
“오늘 10만원인 거 알지? 없으면 뒈진다.”
“잘 알지. 그래서 주려고.”
말을 마치기 무섭게 왼발로 바닥을 치고 앞으로 몸을 날렸다. 뒤로 최대한 뺀 오른쪽 어깨에 반동을 주면서 오른 손을 황범수의 얼굴을 목표로 강하게 뻗었다.
뻑!
느낌이 좋았다. 터져나간 황범수의 입술에서 피가 솟는 걸 똑똑히 목격했다.
“이 존만한 새끼가!”
바닥에 엎어져 머리를 양손으로 감싸고 최대한 몸을 굽혔다. 생각 같아선 정면승부를 하고 싶었지만, 단 한 방에 오른손 주먹과 팔목은 사용불능으로 욱신거렸다. 역시나 네 놈의 주먹과 발이 몸 구석구석에 꽂혔다. 최대한 몸을 보호하더라도 무지막지한 공격을 막기엔 한계가 있었다. 발에 찍힌 옆구리 통증에 숨쉬기까지 힘들었다.
“다들 놔. 이 개새끼 내가 직접 죽인다.”
입 주위가 피로 흥건한 황범수가 네 놈을 밀치고는 멱살을 잡아 끌어올렸다. 처음부터 이 광경을 구경하던 아이들은 누구하나 나서지 않았다. 단지, 찐찌버거인 이상혁이 황범수의 면상에 주먹을 날렸다는 것을 놀라워하는 표정들이었다. 황범수의 주먹이 얼굴에 두 방, 가슴에 두 방, 그리고 복부에 한 방 아주 골고루 꽂혔다.
“뒈졌다고 복창해라. 이 씨발놈아.”
피가 쏟아진 입 안이 얼얼했다. 하도 많이 맞았는지 이젠 아프지도 않았다. 피범벅이 얼굴로 황범수를 똑바로 바라봤다.
“오늘 못 죽이면 다음엔 네가 죽어. 그러니 잘 죽여 봐.”
“이 개새끼가.”
또다시 황범수의 주먹에 맞은 얼굴이 옆으로 돌아갔다.
“뭐하는 거야. 이 새끼들아!”
정말 기막힌 타이밍에 등장한 선생. 조금만 더 맞았다간 진짜 골로 갈 뻔했다. 두들겨 맞긴 했지만, 그래도 한 대 때렸으니 무승부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복도에 대자로 누운 민수의 입가에 미소로 가득했다.
오전엔 양호실, 오후엔 학생주임의 훈계를 듣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워낙 있는 놈들이 다니는 학교라 그런지 쉬쉬하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하, 고삐리한테 쥐어 터지기나 하고, 졸라 쪽팔리네.’
멍이 들기 시작하면서 얼굴은 퉁퉁 부었고 온몸은 곳곳이 쑤시고 욱신거렸다.
“아프냐? 이 형님도 아프다.”
이상혁은 대답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싸움이 시작되면서부터 상혁인 말이 없었다. 혹시 고통을 참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민수는 급히 상혁을 찾았다.
“야, 인마. 있으면 대답을 해.”
- 네.
풀이 죽은 목소리지만, 다행이었다.
“자식. 많이 아팠냐?”
- 아니요. 하나도 안 아팠어요.
“뭐? 그럼 나만 아팠던 거야?”
- 형이 맞는 게 괴롭긴 했어요.
오히려 고통을 느끼지 못한 게 나을 수도 있었다. 특히나 마음이 약한 이상혁이라면 참기 힘들었을 수도. 뒤통수로 전해지는 따가운 느낌, 그게 누군지는 뻔했다.
“존만한 새끼, 오늘 튈 생각하지 마라.”
“니 *이 얼마나 큰지 여기서 까봐. 원래 말 많은 새끼들치고 양아치 아닌 새끼들이 없거든.”
“뭐, 이 씨발놈아!”
“하, 새끼. 입에 아주 걸레를 물고 살아요. 튈 생각 없으니까, 끝날 때까진 좀 조용히 있자.”
황범수는 물론이고 같은 반 아이들도 놀란 표정은 마찬가지. 빵 셔틀, 삥 전담인 왕따 이상혁의 반란이 신기한 듯 바라보면서도 정작 황범수의 눈치를 보느라 고개를 들지 못했다. 씩씩거린 황범수가 돌아가고 민수의 고민에 빠졌다. 황범수와 일대일로 붙더라도 쥐어터질 건 뻔했다. 다섯 놈이라면 죽었다 복창해야할 상황. 그동안 가졌던 깡다구와 해병대에서 몸으로 익힌 기술도 이상혁의 몸으론 어불성설.
- 형, 어떻게 해요?
“신에겐 아직도 12척의 배가 있사옵니다. 도움이 되냐?”
- 아니요.
“자식이, 맞는 것도 나고 아픈 것도 나야. 넌 지켜보기나 해.”
말은 이렇게 했지만, 딱히 다섯 놈을 처리할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수업 종이 울림과 동시에 다섯 놈은 이미 어디론가 사라졌고 결심이 선 민수도 교실을 빠져나갔다.
“야. 이 새끼 튄 거야?”
“톡, 전화 다 씹는데?”
담배연기가 터진 입술과 입안을 자극했다. 피던 담배를 바닥에 던지고 침을 뱉었지만 쓰라림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범수야.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아?”
“뭐가, 이 새끼야.”
“너한테 선빵 날린 것도 그렇고 다굴 당하면서도 노려보면서 졸라 웃더라고.”
모두 동의하는 눈빛. 눈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매일 꼬박꼬박 5만원씩 바치고 화풀이 대상이었던 놈이 하루아침에 변했다. 죽일 듯이 쳐다보던 눈빛, 주먹에 얼굴이 돌아가도 멈추지 않던 비릿한 미소, 때리던 황범수도 소름이 돋았었다.
“시끄러. 넌 동영상이나 잘 찍어.”
“알았어.”
이미 선배들의 귀에도 오늘 일이 들어가 그냥 넘길 수는 없다. 미적거리다간 선배들의 빵 셔틀로 전락할 수도 있었다. 알몸으로 거리를 활보하는 동영상을 찍어오라는 선배들의 명령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켜야했다.
“범수야, 저기.”
“저 새끼 저게 뭐야?”
다섯 놈의 표정이 제각각으로 변했다.
“상혁아.”
- 네. 형.
“끝까지 개기면 최소 두 놈 정도는 오늘 뚝배기 깨진다.”
- 위협만 주려던 게 아니에요?
“아니. 그런데 우리도 각오해야 돼. 아침보다 더 많이 깨질 수도 있거든.”
상혁은 대답이 없었다. 어차피 고통은 민수 혼자의 몫이었다. 지긋지긋한 고딩으로 계속 있고 싶진 않았다.
“어이 친구들, 기다리고 있었어?”
왼손을 흔든 민수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존만아. 손에 뭘 든 거야?”
“아, 이거?”
민수는 손에 들린 굵고 두꺼운 각목을 들어 보였다. 일반적인 각목이 아니었다. 테이프로 오른손과 각목을 고정시켰고 각목 끝엔 굵은 대못이 여러 개 박혀있었다. 다섯 놈의 표정이 변한 것도 그때였다.
“저 존만한 새끼가.”
“어제 죽으려고 17층 창문에 올라갔는데 발 뻗고 자는 니들 생각하니까 억울하더라고. 그래서 생각을 바꿨다. 죽을 때 죽더라도 두 놈 정도는 데리고 가자고.”
“뒈질려면 혼자 뒈져, 이 씨발놈아.”
“기세 좋아. 네 뚝배기 당첨. 또 없어?”
황범수의 옆에서 입을 놀리던 놈이 날카로운 대못의 끝이 번득이는 모습에 몸을 움칠했다. 민수는 양손으로 각목을 움켜잡고는 아주 천천히 앞으로 걸었다.
“저 새끼 구라야.”
민수를 노려보던 황범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해병대에서 깡다구 하나로 버텼던 민수에겐 가소로울 뿐이었다.
“범수야. 네 뚝배기는 진즉 당첨됐으니 너무 걱정 말아라.”
“뭐, 이 씨발놈아. 야! 저 새끼 조져.”
“우리가?”
네 놈이 순간 팔짱을 끼고 꿈적도 않는 황범수를 바라봤다. 대못이 여러 개 박힌 각목에 한 대만 맞아도 골로 갈 건 뻔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네 놈을 보고 민수는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제일 먼저 나서는 놈의 뚝배기가 제일 먼저 깨진다.”
“저 새끼 구라라니까!”
황범수의 반발에도 네 놈의 몸은 땅에 붙었는지 떨어지지 않았다.
“구라면 애들 먼저 보내지 말고 네가 와. 이 새끼야.”
“그래, 간다. 존만아.”
황범수가 앞으로 나서면서 민수는 각목을 쥔 손에 힘을 실었다. 고딩 상대로 각목을 든 건 솔직히 쪽이 팔려도 한참 팔릴 일이지만, 이상혁의 몸 상태로 다섯 놈을 이긴다는 건 처음부터 무리였다. 겁을 먹고 도망가기를 바랐다. 여기에서 물러서면 이상혁은 더 큰 고통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끝은 봐야했다.
삐이익! 삐이익!
갑자기 울리는 호루라기 소리. 각목을 쥔 민수나 앞으로 나선 황범수, 그리고 그 뒤를 지킨 네 놈 모두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짭새야. 튀자.”
“운 좋은 줄 알아. 내일 학교에서 보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튀는 다섯 놈. 그러나 민수는 그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각목을 손에 묶은 채로 도망칠 수는 없었다. 어쩌면 잘 된 일일지도 몰랐다. 경찰이 개입하면 학교 폭력을 조사할 테고 결과는 알 수 없지만, 이상혁의 미래가 바뀌는 건 분명했다. 그러나 민수의 이런 기대는 무참히 깨졌다.
“괜찮냐. 이상혁.”
손에 묶인 테이프를 힘겹게 푸는 민수의 뒤로 들리는 나긋나긋한 목소리.
“소녀는 누구?”
- 형, 김소희에요. 우리 반 반장.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사라졌던 이상혁이 김소희의 등장에 광분하며 다시 나타났다. 괘씸했지만, 아직 겁이 많은 이상혁을 이해해 주기로 했다.
“소희구나. 여긴 웬일이야?”
“나 반장인 거 몰라? 너 뒤쫓았어.”
“왜 날 쫓아?”
“얻어 터질까봐, 불쌍해서 쫓았다.”
톡 쏘는 게 매력인가? 민수는 김소희를 바라봤다. 반장이니 공부는 잘할 게 뻔했고 얼굴도 제법 귀여운 스타일.
11년 차이, 극복할 수 있을까? 민수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 형!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넌 좀 가만히 있어라.”
“야, 너 지금 나한테 하는 말이야? 기가 막혀서.”
발끈하는 모습도 제법 귀여웠다. 이상혁은 뭐가 열이 받는지 괴성을 질러댔지만, 민수는 깡그리 무시해 버렸다.
“어쨌든 고맙다.”
“내일부턴 어떡할 거야?”
“죽기야 하겠어? 남잔 깡다구거든.”
“너 알아서 해라. 깡다구는 무슨?”
찬바람을 일으키고는 김소희는 가던 길로 사라졌다. 한참동안 김소희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민수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상혁이 너, 쟤 좋아하냐?”
괴성을 지르던 이상혁은 순식간에 침묵모드.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뻔했다.
***
“너 얼굴이 왜 그래?”
퉁퉁 부은 얼굴, 멍자국, 찢긴 교복. 척 봐도 ‘얻어 터졌어요.’라는 말을 대변하는 모습에 상혁이 어머니는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렇다고 넘어졌다는 핑계를 댈 순 없었다.
“친구들과 다툼이 좀 있었을 뿐입니다.”
“누구랑 싸운 거야? 이래서 엄마가 학교에 간다고 한 거잖아. 이건 그냥 넘길 수 없어. 전화, 전화기 어딨어?”
발을 동동 구르면서 전화기를 찾는 상혁이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어머니, 사내놈이 싸울 수도 있는 거죠. 애들 다 싸우면서 크는 겁니다.”
“너 말투는 그게 뭐니? 엄만 그냥 못 넘긴다.”
“제가 평생 부모의 그늘에서 살기를 바라십니까?”
황당한 표정의 상혁이 어머니. 혼자 있기 좋아하고 자기주장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던 아들이었기에 지금 상황이 믿겨지지 않는 표정이었다.
“상혁이, 너 일루 와봐.”
거실에서 들리는 굵직한 상혁이 아버지의 목소리. 민수는 상혁이 어머니의 손을 이끌고 거실로 향했다.
“아버지. 학교 다녀왔습니다.”
“학원은 안 간 거냐?”
“중요한 일이 있어, 안 갔습니다.”
“앉아봐.”
상혁이 아버지의 첫인상은 선이 굵다는 느낌? 어쩌면 이런 모습이 이상혁에겐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으로 느껴졌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엄마의 잔소리로 단련이 된 민수에겐 그저 일상적인 일에 불과했다.
“납득 가도록 설명해봐.”
“평소에 절 괴롭히던 놈들이 있었습니다. 빵 셔틀, 왕따, 뭐 대충 이런 것들입니다.”
“전화기 어딨어? 전화기!”
놀란 상혁이 어머니,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소파에서 일어나 발을 동동 굴렸다.
“당신은 좀 가만히 있어.”
“여보, 이게 참을 일이에요? 왕따라잖아요. 왕따.”
“상혁이 얘기 아직 안 끝났어. 더 들어 보자고.”
그렇게 귀한 자식, 왜 이따위로 키운 겁니까? 민수는 이 말을 끝내 말하진 못했다.
“계속해봐. 그래서.”
“솔직히 나쁜 생각도 했었습니다.”
“그래서 어제···.”
상혁이 어머니는 이마를 손으로 대고 소파에 쓰러졌다. 그러나 상혁이 아버지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그놈들과 정면으로 부딪혔습니다. 물론 제가 많이 맞긴 했지만, 선빵을 날려서 한 놈의 면상을 갈겼거든요.”
“앞으론 어떻게 할 거냐?”
“시작했으니 끝을 봐야죠. 당분간 제 몰골이 험악하더라도 절대 나서지 말아 주십시오. 애들 싸움에 부모가 나서는 거 쪽팔리거든요.”
소파에 쓰러져 발을 동동 구르는 어머니와 달리 상혁이 아버지는 표정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자식이 맞고 왔는데 기분 좋을 부모는 없다. 그런 점에서 상혁이 아버지가 보이는 행동은 민수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너 아빠랑 술 한 잔 하자.”
“네? 뭐, 주시면야.”
장식장에 놓인 발렌타인 30년에 시선이 돌아간 민수는 입맛을 다셨다. 예전 아버지가 선물로 받은 것을 몰래 맛 봤었다. 그때의 그 짜릿함은 지금도 잊을 수 없었다.
“마셔.”
투명한 잔 안에서 찰랑거리는 적갈색의 발렌타인 30년을 받았다. 먼저 숨을 들어 마셨다. 오크통에서 숙성된 향기가 코를 통해 예전의 기억을 자극했다.
“감사합니다.”
쇠뿔도 단숨에 빼라고 원샷. 혀를 한껏 농락하더니 식도에 짜릿함을 선사하면서 넘어가더니 몸 전체에 열기를 주면서 승화했다.
“한잔 더 할래?”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여보! 지금 애한테 뭐하는 거예요!”
날카로운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한잔으로 끝이구나, 민수가 절망할 무렵.
“난 상혁이 나이 때, 술은 물론이고 담배도 폈어. 내가 그래서 지금 잘못 컸어?”
“아버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다시 술 한 잔을 받았다. 어쩌면 이상혁을 가장 이해해주는 사람, 가장 아끼는 사람이 아버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혁아.”
“네.”
“어제의 나쁜 생각이 네 생각과 행동, 말투를 바뀌게 한 거냐?”
“뭔들 못하겠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모가 아닌 저만의 방식으로 해결해보고 싶었습니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머리가 빙빙 돌기 시작했다. 단 두 잔에 취할 민수는 아니었지만, 이상혁의 몸은 달랐다. 상혁이 아버지의 말을 듣기 위해 민수는 정신을 똑바로 붙들었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봐. 후회는 남기지 말고.”
“감사합니다.”
“자식, 다 컸어.”
거실에선 상혁이 부모의 설전이 한창이었다. 분위기를 봐선 이번엔 상혁이 아버지가 이길 것 같았다. 취기가 올라 침대에 누운 민수는 이상혁을 불렀다.
“상혁아.”
- 네. 형.
“네 아버지도 널 많이 사랑하시는 거 같더라.”
-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형, 내가 왜 왕따를 당했을까요?
“그건 아주 간단해. 당할 놈이 당하는 거거든.”
여전히 머리는 빙빙 돌았다. 그래도 간만에 발렌타인 30년을 맛볼 수 있어 좋았다.
“상혁이 너 공부 잘해?”
- 그렇게 잘하진 못해요.
“싸움을 원톱으로 잘 하거나, 아니면 공부를 무지 잘하거나, 이런 재수 없는 놈들은 안 건드려. 어정쩡한 놈들이 만만하니까 건드리는 거야.”
- 대부분은 다 평범하다고요.
“그렇지. 그럴 때 필요한 게 깡다구야. 잘 봐, 형이 내일부터 어떻게 하는지.”
피곤한 하루였다. 온몸은 여전히 뻐근하고 욱신거렸다.
“아버지는 뭐하시는 분이냐?”
- 아빠요?
“그래. 평범한 분은 아니신 것 같은데.”
- 그, 그냥 공무원이에요.
선이 굵다는 느낌, 공무원과 어쩌면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천정이 빙빙 도는 느낌에 민수는 눈을 감았다. 내일부턴 정말 힘든 하루하루가 될 게 분명했다.
둘째 날.
“범수야. 이거 받아라.”
“뭐야, 이 새끼.”
퍽!
뒤로 돌아온 민수는 고개를 돌리는 황범수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공교롭게도 어제 터진 입술이 다시 터졌다.
“씨발, 이 존만한 새끼가.”
또 다시 다섯 놈의 무지막지한 구타가 시작되었다. 머리와 복부를 양팔로 최대한 보호하면서 바닥에 엎어진 민수는 구타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셋째 날.
“빵 셔틀도 사라지고 쏠쏠하게 들어오던 돈도 없고, 좆같네.”
“이 새끼, 왜 안 보여?”
세 번은 안 당한다는 생각에 다섯 놈은 한 곳에 뭉쳐있었다. 만만에 준비를 하고 기다렸지만, 1교시가 끝날 때까지도 민수는 보이지 않았다. 안심하던 찰라, 교실 문을 열고 민수가 들어왔다.
“범수야. 많이 기다렸냐?”
“저 새끼, 저거.”
“화장실에서 가져온 거라, 냄새는 좀 날 거다.”
뭔지 모를 물이 뚝뚝 떨어지는 대걸레를 수평으로 잡고 황범수를 향해 그대로 돌진했다. 네 놈이 기겁을 하고 피한 사이, 대걸레가 황범수의 얼굴을 쓸었다. 그와 동시에 민수의 주먹이 또 다시 그곳에 정확히 꽂혔다.
“아이 씨발!”
그리고 어김없이 이어지는 다섯 놈의 구타. 바닥에 엎어진 민수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넷째 날.
“너 뭐야? 왜 이렇게 늦었어?”
“죄송합니다. 늦잠을 자서요.”
“뒤에 나가서 벽보고 서있어.”
수업에 늦은 민수. 선생님의 불호령에 가방을 자리에 놓고 뒤로 나갔다. 공교롭게도 거긴 황범수가 앉은 자리 바로 뒤였다.
“내가 그리웠냐?”
“넌 뒈졌어.”
수업은 계속 이어졌다. 민수는 벽을 보고 서 있었고 황범수와 패거리는 그런 민수를 힐끗거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수업이 끝날 무렵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상혁, 이제 들어와서 앉아.”
벽을 보던 민수는 몸을 돌리고는 그대로 주먹을 황범수에게 날렸다.
퍽!
“기대를 저버리지 않지?”
“이 개새끼가!”
교실은 난장판이 되었다. 선생님이 달려와 둘을 뜯어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네 놈은 눈치를 보느라 움직이지 못했고 처음으로 황범수와 일대일로 붙을 수 있었다.
두 대 맞고 한 대 때리는 불공정한 싸움이었지만, 민수는 군대에서 배운 격투기로 팔로 황범수의 주먹을 막으면서 자신의 주먹은 정확하게 면상에 꽂아 넣었다. 그러나 힘에서 오는 차이는 어쩔 수 없었다.
“둘 다 따라 나와!”
종일 교무실에서 보내야 했다. 선생님들의 쯧쯧 거리는 소리, 그리고 열 페이지가 넘는 반성문을 쓰는 것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민수는 그저 학생주임을 중간에 두고 씩씩 거리는 황범수의 퉁퉁 부은 얼굴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그러나 한 가지, 찝찝한 게 있었다. 학교 전체에 소문날 정도인데도 벌칙은커녕 부모님을 모셔오란 말이 없었다.
다섯째 날.
황범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매일 방식을 바꿔가며 하루에 한 대씩 주먹을 날리려던 계획이 틀어졌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오후 수업이 막바지인데도 황범수는 끝내 오지 않았다.
계획은 중단돼선 안 된다. 민수는 남은 네 놈의 중에서 한 놈을 골랐다.
“범수 왜 안 오냐?”
“알아서 뭐하게, 이 잉여새끼야.”
“싸가지 하고는. 너라도 대신 맞자.”
퍼퍽!
준비할 틈도 주지 않고 민수는 놈의 면상에 스트레이트와 어퍼컷을 연이어 날렸다. 순간적인 공격에 놈은 뒤로 나자빠졌고, 민수는 쓰러진 놈의 배를 발로 찍고는 배에 올라타 주먹을 날렸다.
‘어라?’
처음으로 변화가 생겼다. 조금 때리고 방어 자세를 취하려 했지만, 남은 세 놈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떼거지로 몰려와 다구리를 놓던 놈들에게 처음으로 생긴 균열이었다.
***
교장실엔 여러 선생들이 모였다. 교장은 물론이고 교감, 학생주임, 담임까지 표정들은 하나 같이 심각했다.
“방금 범수 어머니 전화를 받았어요. 애 얼굴이 만신창이가 될 때까지 뭘 했냐고 항의를 하더군요.”
“사실 상혁이는 물론이고 애들을 먼저 괴롭힌 건 범수입니다. 저희가 눈을 감아줬던 게 원인이라고 봅니다.”
“허허, 그걸 누가 몰라서 이럽니까? 원인을 따지려는 게 아니라, 나온 결과를 해결하자는 겁니다.”
교장의 질책에 학생주임과 담임은 인상을 찡그렸다. 범수의 악행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었다. 학교 차원에서 엄하게 벌해야 한다고 직언할 때마다 교장과 교감은 이를 묵살했다. 그건 범수의 아버지가 서울지방경찰청 경무관이란 사실 때문이었다.
“정 선생. 상혁이 부모님과는 만나본 적 있습니까?”
“요샌 뜸하지만, 학기 초엔 어머님이 자주 찾아 왔었습니다.”
“부친은 뭘 하십니까?”
“일반 공무원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담임인 정상화는 부모의 직업으로 아이를 판단하려는 교장의 의도를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이 일이 외부로 알려지면 골치 아파요. 어떻게든 마무리를 짓고 넘어가야 합니다.”
“그 말씀은?”
“흠. 상혁 군의 상태는 공격적이고 파괴적이라고 밖에 볼 수 없어요. 전학을 종용하고 그게 안 되면 퇴학시켜야지요.”
“교장 선생님. 상혁이도 잘못했지만, 원인 제공자는 범수입니다. 범수를 두고 상혁이만 처벌하다니요?”
정상화는 교장의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교장은 정상화의 주장을 묵살했다.
“내일 상혁 군 부모님을 학교로 부르세요. 학교폭력은 반드시 근절돼야 합니다.”
끗발에 밀리는 세상.
이런 부조리한 세상을 바라보는 애들의 미래는 암울하다는 생각에 정상화는 교장실을 박차고 나갔다. 그러나 변한 건 아무 것도 없었다.
***
“하나, 둘, 셋. 정확히 외치고 찢어 주세요.”
“알았어. 하나.”
으악!
비록 이상혁의 몸이었지만, 민수는 사타구니를 잡고 바닥에 몸을 데굴데굴 굴렸다.
“치사하게!”
“긴장하면 더 아파. 며칠 고생하면 괜찮아질 거야.”
상혁이 아버지를 설득해 그동안 다니던 영어와 수학 등 모든 학원을 끊고, 헬스와 격투기 도장에 등록했다. 삐쩍 마른 몸에 뼈까지 굳었는지 올라가지 않는 다리를 찢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양쪽 다리를 코치 두 사람이 잡고 한 사람이 위에서 몸을 누르는, 어쩌면 원초적인 방법이지만 효과는 컸다. 제대로 설 수가 없었다. 부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섰지만, 사타구니로 전달되는 찢어지는 고통에 민수를 얼굴을 찡그렸다.
“오늘은 그만 갑니다. 내일 다시 올게요.”
“내일? 힘들 텐데.”
“그건 내가 알아서 해요.”
“그러든지. 넌 자세도 좋고 이해도 빨라서 금세 늘긴 할 거야.”
대학과 군대시절에 몸으로 익힌 격투기라 자세와 동작은 머리로 기억하고 있었다. 단지, 이상혁의 몸이 받쳐주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건물을 나온 민수의 걸음은 고래를 잡은 첫날의 모습과 흡사했다.
“아, 내일이 심각하게 걱정되네.”
- 그러기에 다리는 왜 찢어요?
끝을 보기 위해선 내일도 황범수의 면상에 주먹을 날려야했다. 몸이 이 지경이라 제대로 주먹을 날릴지도 걱정되었다. 그나마 남은 네 놈이 기가 질렸다는 거 하나가 다행이었다.
“아무래도 이해가 안 돼.”
- 뭐가요?
“네가 공부를 잘하길 해, 아니면 운동을 잘해. 특별한 것도 없는 네가 왜 죽어선 안 될 인물이란 건지 통 모르겠다.”
- 형은 내가 죽기를 바라요?
“인마, 그렇다는 얘기라고. 너 때문에 개고생하는 내가 불쌍하지도 않냐?”
- 그건 미안해요.
“네가 뭔 죄가 있겠냐. 다 스머프 그 새끼 때문인데.”
- 스머프요?
“그런 게 있어.”
황범수가 없는 관계로 오늘은 일방적인 구타는 당하지 않았다. 서서히 바뀌는 건 느껴졌지만, 아직 갈 길은 멀었다.
“인마, 공부하란 소린 안 해. 내가 없더라도 운동 게을리 하지 마라. 알았냐?”
- 네. 저도 요새 느낀 게 많아요.
“왜 고통은 내 몫이냐고. 오늘은 택시 타고 가자.”
도저히 걸을 자신이 없었다. 매일 받는 5만원을 깨는 건 싫었지만, 내일을 준비하기 위해선 찢어진 다리를 무리해선 곤란했다. 택시에 올라탄 민수는 고통에 찌든 사타구니를 연신 주물렀다.
***
“다녀왔습니다.”
아무런 대답이 없다. 평소라면 버선발로 뛰어나와 몸 상태를 확인부터 하는 상혁이 어머니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어기적거리는 자세로 거실을 힐끗거렸다. 소파에 앉은 부모님의 표정은 심각했다.
“다녀왔습니다.”
“여기 좀 앉아 봐라.”
여전히 상혁이 아버지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읽을 수 없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계속 눈물만 훔치시는 상혁이 어머니를 봐선 좋은 분위기가 아니란 것은 확실했다.
“학교에서 전화가 왔었다. 널 전학 보내라고 하더구나.”
대충 그림이 그려졌다. 전학이야 가면 그만이지만, 왜 다섯 놈을 놔두고 피해자인 이상혁이 전학을 가야하는 건지는 이해가 되질 않았다.
“사내가 칼을 뽑았으면 썩은 무라도 잘라야지요. 전학가면 다른 곳에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전학 안 가겠습니다.”
“네 엄마 말로는 전학을 안 가면 퇴학 처분을 내린다고 했다더구나.”
“네?”
기도 안 찼다. 그동안 왕따를 당하고 빵 셔틀과 구타를 당할 때까진 나 몰라라 하던 학교가 겨우 일주일밖에 안 된 소동에 퇴학을 결정하다니. 분명 뭔가가 있을 게 확실했다.
“네 생각은 어떤 거냐?”
잠시 숨을 골랐다. 다른 건 몰라도 전학과 퇴학은 혼자 결정할 일이 아니었다.
“아버지, 잠시 화장실에 갔다 와서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불편한 다리를 억지로 이끌고 화장실에 들어간 민수는 급히 이상혁을 찾았다.
“야. 너 어떡할 거야?”
- 형 생각은요?
“전학 가봤자 네가 왕따였다는 소문은 금방 퍼져. 결국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돼. 그러나 퇴학은 또 다른 문제야.”
- 형 같으면 어떻게 할 건데요?
“나? 나라면 끝을 보지. 까짓것 퇴학당하면 검정고시를 치면 되는 거고.”
- 그럼 저도 그렇게 할래요.
“후회 안 해?”
- 죽으려고도 했었어요.
이왕 이렇게 된 거 돌이킬 수는 없었다. 민수는 소파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건 상혁이 부모님에 대한 개인적인 죄송함 때문이었다.
“아버지. 끝을 보기 전에는 전학 안 가겠습니다.”
“퇴학을 당해도?”
“네. 검정고시를 치면 됩니다. 그 자식들을 그냥 놔둘 수는 없습니다.”
민수의 결심에 상혁이 어머니가 발끈하고 일어섰다.
“상혁아! 너 도대체 왜 이러는 거니!”
“당신은 가만히 있어. 이건 남자대 남자의 일이야.”
“여보! 애 인생이 달린 문제라고요.”
“인생이 달렸기 때문에 내가 이러는 거야.”
민수는 아무 말도 없이 무릎만 꿇고 있었다. 어머니의 화를 단숨에 제압한 상혁이 아버지의 목소리엔 흐트러짐이라곤 전혀 없었다.
“네 결심이 그렇다니 우선은 알겠다. 그리고 너와 한 약속은 내가 지키지 못할 것 같구나.”
“네?”
민수를 고개를 들어 상혁의 아버지를 바라봤다. 거기에서 처음으로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으로 변했단 얘기야. 좀 쪽팔리게 됐다.”
“여보!”
“당신은 내일 집에 있어. 학교는 내가 갈 테니까.”
상황이 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물은 이미 엎질러졌고 돌이킬 수 없었다. 방에 돌아와 침대에 누운 민수는 천정만 묵묵히 바라볼 뿐이었다.
- 형, 어떡해요?
“어떡하긴, 내일 또 패러 학교에 가야지.”
***
“야. 이상혁.”
결전을 앞두고 비장한 각오로 학교에 들어선 민수는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저요?”
“그래, 인마. 넌 수업들을 필요 없어.”
“왜요?”
“그냥 잔말 말고 따라오기나 해.”
정문에서 학생주임이 기다린 것도 이상했고 학생주임을 따라 교실이 아닌 교장실로 끌려간 것도 수상했다. 복도를 지나며 황범수와 마주쳤다. 교실로 들어가면서 비릿하게 웃는 황범수. 그제야 대충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넌, 부모님이 오실 때까지 여기에서 기다려.”
기다리는 건 힘들지 않았다. 여긴 사회가 아니라 학교다. 그럼에도 부모의 재산과 권력에 따라 학생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뀐다. 이런 현실이 너무 엿 같아 참을 수 없었다. 주먹을 책상을 내려쳤지만, 달리지는 건 없었다.
“나와. 아버님 오셨다.”
실실 쪼개는 학생주임에 민수의 화는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이런 엿 같은 학교, 두고 봅시다.”
“이 자식이 버르장머리 없게.”
“놔!”
학생주임이 잡은 어깨를 손으로 내리치고 교장실로 향했다. 어차피 전학을 거부하는 이상 퇴학은 정해졌다. 당분간 이상혁의 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런 엿 같은 학교를 포함해서 끝을 볼 생각에 민수를 이를 갈았다.
“어, 상혁 군. 아버님 옆에 앉게.”
교장, 교감, 학생주임과 시선을 일일이 교환한 후에 민수는 상혁이 아버지 옆에 앉았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신경 쓰지 마라. 어른들 얘기하는데 끼어들지 말고.”
민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닫았다. 나선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었다. 이상혁이 권력의 힘에 무너질 아버지를 보게 되는 것이 마음 아팠지만, 이런 경험이 이상혁을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죄송합니다. 교장 선생님. 말씀 계속 하시죠.”
“흠흠. 저희 학교는 학교폭력에 엄중하게 대처했습니다. 허나 상혁 군에게는 여러 번 기회를 줬습니다. 달라지기를 바랐지만, 이젠 수업시간에도 먼저 싸움을 걸 정도로 난폭해졌습니다. 교칙으로는 퇴학이 정당하지만, 상혁 군의 장래를 생각해 전학으로 결정한 겁니다.”
“학교폭력을 근절해야 한다는 말씀, 지당하십니다. 제 아들놈이라도 용서해선 안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흠흠.”
의기양양한 교장. 거기에 굽실거리는 상혁이 아버지. 기대도 안 했기에 실망도 없었다. 단지 혼자 눈물 흘릴 이상혁이 걱정될 뿐이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교장 선생님.”
“말씀하시지요.”
“가해 학생은 제 아들놈이고 피해 학생은 황범수라는 학생 외에 네 명입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키도 작고 삐쩍 마른 제 아들놈이 학생 다섯을 무슨 힘으로 두들겨 팼을까요?”
“그건 말입니다.”
“혹시 왕따를 당한 제 아들놈이 끝내 견디지 못하고 폭발한 건 아닐까요?”
상황은 서서히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공무원이라 그런지 상혁이 아버지의 말 속에 논리와 의혹, 거기에 추궁까지, 교장을 순간 당황하게 만들 정도였다.
“아이들의 다툼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도를 넘을 정도로 심한 건 아니었습니다. 거기에 비해 상혁 군이 보여준 폭력성은 도를 한참 넘어섰습니다.”
“그렇군요. 제가 알아본 것과는 좀 달라서 다시 한 번 확인하기 위해 여쭤본 겁니다.”
“무얼 확인한다는 말씀이시죠?”
상혁이 아버지는 가방에서 여러 장의 서류를 꺼냈다. 그리고 그 서류를 바라보는 선생들의 눈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상혁이의 카톡 내용입니다. 눈 뜨고는 읽을 수도 없을 정도의 내용이더군요. 그리고 이건 1학년 3반 반장인 김소희 학생의 진술서입니다. 학기 초부터 엄청난 시달림을 받았고 구타, 현금 갈취, 인격모독, 직접 읽어 보시죠. 참고로 부모의 동의를 받고 작성한 내용이니 법적인 문제는 없습니다.”
공무원이 어떻게 이런 준비까지?
서류를 읽는 선생들의 놀란 표정, 상혁이 아버지를 바라보는 민수의 놀란 표정은 일맥상통했다. 그러나 교장은 버티기에 들어갔다.
“상혁 군이 먼저 폭력을 행사한 건 변하지 않아요. 학생들이 증언한 서류도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러시군요. 혹시 황범수 학생의 부친이 이번 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했습니까?”
“말씀이 지나치시군요.”
“그렇다면 죄송합니다. 그건 제가 직접 확인하겠습니다. 잠시 전화 한통 하겠습니다.”
상혁이 아버지의 논리적인 공격에 교장을 포함한 선생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민수는 그제야 상혁이 아버지의 직업이 일반 공무원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휴대폰을 꺼낸 상혁이 아버지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고는 스피커를 눌러 모두 들을 수 있게 했다.
- 여보세요.
“황인호 경무관님 되십니까?”
- 누구시죠?
“서울 중앙 지방검찰청 특수부 부장검사 이기영이라고 합니다. 이상혁 학생의 아버지이기도 하고요.”
이상혁의 아버지가 부장검사, 그것도 특수부?
상황은 순식간에 뒤집혔다. 교장은 물론이고 교감과 학생주임까지 흐르는 땀을 훔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상혁, 이 괘씸한 새끼야. 그동안 감쪽같이 속여?’
민수의 분노에 이상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상혁이 아버지의 목소리엔 자신감과 확신이 차 있었다.
“교장 선생님께선 학교폭력에 엄중한 잣대를 지니고 계시다고 합니다. 만약 제 아들놈이 왕따 가해자이고 폭력의 중심에 있는 놈이라면 제 손으로 직접 처넣을 겁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흠흠. 애들이 크면서 싸움도 할 수 있는 거지요.
“아니요. 철저한 조사가 당연히 필요하지요. 제 아들놈이 폭력을 행사한 건 일고의 가치가 없이 벌을 받게 될 겁니다. 그러나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밝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법적인 책임을 묻게 될 겁니다. 동의하십니까?”
- 제가 곧 학교로 가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통화는 그것으로 끝났다. 소파에 등을 기대고 편하게 앉아 있던 선생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의자 끝에 걸쳐 앉아 처분만 바라는 모습이 너무 비굴했다.
“저, 상혁이 아버님. 뭔가 오해가 있었나 보신데, 전학이나 퇴학은 그냥 해본 말입니다. 그래야 상혁 군도 잘못을 뉘우칠 것 같았거든요.”
“잘못이요? 전 제 아들을 믿습니다. 시시비비는 곧 가려질 거니 그때 다시 얘길 나누시죠.”
“진작 검사님이라고 말씀을 하시지. 공무원이라고 하셔서.”
“검사도 경찰도 국가의 녹을 먹는 공무원입니다. 뭐가 잘못됐나요?”
이번 일로 학교는 발칵 뒤집혔다. 검찰이 직접 이번 사건을 재조사하기 시작했다. 이상혁과 황범수의 애들 싸움은 부모의 싸움을 넘어 검찰과 경찰의 싸움으로 판이 커졌다.
그러나 같은 조건에서 경찰은 검찰을 넘을 수 없었고 명분까지 있는 이상, 황인호 경무관은 바닥에 바짝 엎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공식적인 사과와 함께 황범수와 네 놈은 서울 외곽으로 전학을 갔고, 남은 일진들은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상혁은 왕따에서 영웅으로 승격된 건 지극히 당연했다.
“너 좀 멋있더라.”
“원래 멋있었다.”
“치. 정말 끝까지 범수와 싸울 생각이었어?”
“내가 말했지. 남잔 깡다구라고.”
“이거 받아. 토요일이 내 생일이니까, 선물 가지고 늦지 않게 와.”
고것 참, 볼수록 귀엽게 생겼단 말이야. 초대장을 주고 종종 걸음으로 사라진 김소희를 바라본 민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형!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야!
“인마, 나도 열한 살 차이는 관심 없어. 자식이 사귀게 해줘도 난리야.”
이정도면 끝났겠지?
이상혁과의 이별도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직감했다. 그러나 왜 이상혁을 구했는지에 대한 답은 여전히 찾을 수 없었다. 아직은 학생이니 이상혁이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혹시?
만약 이상혁이 그때 자살을 했다면, 가장 고통 받았을 사람은 부모였다. 어쩌면 아버지인 이기영 부장검사를 살리기 위해서 이상혁을 구한 것은 아닐까?
- 형, 나 좀 이상해.
“나도 몸이 좀 근질거리긴 하다.”
전기가 온몸에 퍼지는 것 같은 찌릿함. CCTV가 없는 아파트 계단으로 뛰어 오르던 민수는 발을 헛디디고는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다.
“아, 졸라 아프네.”
“형, 이번엔 나도 아파요.”
“아파?”
몸을 살핀 민수는 옆에 넘어진 이상혁을 발견하곤 허탈하게 웃었다. 어떻게 다시 돌아왔는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민수는 이상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 아버지 멋있는 분이더라.”
“나도 이번에 처음 알았어요.”
“형은 좀 슬퍼. 결국 네 아버지의 끗발이 범수 아버지를 이긴 거니까. 근데 이게 현실이야. 네가 더 크면 이런 엿 같은 현실과 많이 부딪힐 거다.”
민수와 이상혁은 계단 벽에 몸을 기댔다. 그동안 맞아온 여러 상처와 흔적들이 아팠는지 이상혁은 얼굴을 찡그리며 고통스러워했다.
“무지하게 아픈데, 형은 어떻게 참았어요?”
“아프다고 앞으로 피할 거야?”
“아뇨. 형한테 많이 배웠어요. 특히 깡다구.”
“자식, 주둥이만 살아서. 앞으로 열심히 살아라. 이 형은 간다.”
시간은 보름이 흘렀지만, 민수 자신은 변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낡은 운동복을 툴툴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 계단을 내려갔다.
“형, 모아둔 돈 안 가져가요?”
“소희한테 근사한 선물이나 사줘.”
이별은 깔끔할수록 좋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손을 흔든 민수는 엘리베이터로 사라졌다,
“아 씨, 돈을 가져오라고 할 걸 그랬나?”
버스는 이미 떠났다.
***
민수는 현관문을 열지도 못한 채 서성거렸다. 보름동안 연락도 않고 사라졌으니 어쩌면 실종신고를 했을지도 몰랐다.
“너 여기서 뭐하냐?”
“헉. 엄, 엄마.”
엘리베이터를 놔두고 계단을 걸어올지는 생각지도 못했다. 민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어차피 맞아야할 매라면 미리 맞는 게 나았다. 그러나 기다려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안 들어오고 뭐해?”
“기분이 좀 나빠지려고 하네.”
“뭐야? 맞아야 정신을 차리겠냐?”
“꼭 그렇다는 건 아니고.”
자식이 보름동안 연락두절이었는데 이렇게 태연한 모습이라니. 아무리 백수라지만, 설움이 몰려왔다.
“그래, 일은 잘 끝났어?”
“일? 무슨 일?”
“네 친구한테 연락 받았다. 중요한 일이라 당분간 연락이 안 될 거라면서.”
점점 미궁으로 빠져드는 기분. 친구 놈들은 지들 살기 바쁘고 백수인 자신의 연락을 꺼려한다.
“엄마, 친구 누구?”
“뭐라더라? 스··· 스 뭐라고 했는데.”
“혹시 스머프?”
“아. 그래, 맞다. 스머프라고 하면 안다고 하더라.”
사람을 개고생하게 만들고 실실거릴 스머프를 생각하니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다. 임무도 끝났고 괜히 욕 한번 잘못해서 다시 횡당보도로 갈 순 없었다.
“얼마 벌었니?”
“뭘 벌어?”
“달라고 안 할 테니까, 중요한 일이었으면 많이 벌었겠네.”
“개털이야. 개털.”
방에 들어온 민수는 생각에 빠졌다. 앞으로 언제까지 이런 일을 계속할지 답이 없었다. 취직한다는 보장은 아직 없었지만, 직업을 갖게 되면 이 일을 할 수 있을지 걱정부터 앞섰다.
애인은, 결혼은?
갑자기 사라지는 사람을 이유 없이 기다려줄 사람과 회사는 없다. 결국 차에 치여 죽지 않으려면 백수로 지내며 이 짓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건 인간적으로 너무 불쌍하잖아.”
민수는 깡다구를 잊고 처음으로 절망했다. 다른 건 몰라도 여자 친구를 만들 기회조차 없다는 사실이 엿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띠링.
무심결에 메시지를 누른 민수는 좀 전의 절망을 단번에 잊고 얼굴을 환하게 폈다.
<첫 임무 성공을 축하합니다.
성공 수당 5,000,000원을 지급합니다. 일층 우편함을 확인하세요.>
숫자 0을 세고 또 셌다. 5백만 원. 보름간 개고생의 대가로는 충분하고도 넘쳤다.
“스머프야, 눈물 나게 고맙다.”
민수는 스마트폰에 입술까지 찍어가며 감격했다.
띠링.
<월급은 없습니다. 성공 수당은 임무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리고 5분 후, 우편함의 봉투는 사라지니 참고하세요.>
“뭐? 이게 미쳤나.”
신발도 제대로 신지도 못하고 밖으로 내달렸다. 엘리베이터의 숫자는 1층, 시간이 없었다. 이때 필요한 건 순발력. 민수는 젖 먹던 힘을 다해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그리고 우편함에 꽂힌 한 통의 묵직한 봉투를 손에 쥐고 감격했다.
“그래.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어.”
그동안 엄마한테 당한 설움과 미안함을 단번에 날리고 싶었다.
“엄마, 쓰세요.”
빳빳한 5만원 권 백장을 과감하게 모두 줘버렸다. 임무는 앞으로도 있을 거고 목돈은 그때 다시 만져도 충분했다. 그러나 어떤 임무가 기다릴지는 민수도 알지 못했다.
이민수, 스타 되다.
일주일이 지나도록 메시지는 없었다. 슬슬 엄마의 지능적인 잔소리가 다시 시작된 것도 그쯤이었다.
“5백 줄 땐 좋아하시더니, 이건 먹튀야.”
인간이 간사한 동물이란 게 실감이 났다. 몸은 좀 고달팠지만, 단 보름 만에 5백만 원이란 거금을 손에 쥐고 보니 이젠 은근히 기다려지기까지 했다. 담배 한 대가 간절해질 무렵, 벌컥 문이 열렸다.
“아들, 중요한 일은 또 없나?”
“엄마! 모자지간에도 지킬 예의가 있거든. 노크 좀 해.”
“아이고, 그러세요? 이 미천한 것이 예의를 몰랐네요. 여긴 제 집인데, 닥치고 나가 주실래요?”
“5백만 원 받은 지 얼마나 됐다고. 내가 주나 봐라.”
울컥하는 마음에 집을 뛰쳐나왔지만, 주머니엔 만 원짜리 한 장이 전부. 갈 곳도 없고 부를 놈도 없고, 구석진 곳을 찾아 정말 아껴 피우는 담배 한 대를 입에 물었다. 공중으로 오르던 담배 연기가 어느 순간 흩어져 사라져 버렸다.
“달은 왜 이렇게 밝냐. 기분 나쁘게.”
마지막 한 모금을 깊게 빨아 내뿜고 바지를 털고 일어섰다. 집에 가 봤자 좋은 소리는 듣지 못할 게 뻔했다. 처량한 백수에게 쉼터가 되 줄 곳은 PC방이 유일했다.
전 재산은 만원. 지폐 한 장을 손에 쥐고 갈등하던 민수는 비장한 각오로 PC방으로 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띠링.
한통의 문자. 이 한통의 문자를 받기 위해 민수는 수많은 고뇌의 시간을 보냈다. 떨리는 손으로 메시지를 눌렀다.
<최지환 34세, 삼성동 스프렌드 301호. 23시 49분.
성공 수당 10,000,000원. 성공을 기원합니다.>
“처, 천만 원?”
0을 세던 민수는 다시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평생 만져보지도 못한 엄청난 금액이었다.
“정신 차리자, 이민수. 아자, 아자!”
우선 스프렌드의 위치를 파악했다. 전철을 이용하면 11시 49분까진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 다시 의기양양해진 민수는 단축번호를 찾아 눌렀다.
- 안 들어오고 뭐해!
전화기에서 뿜어지는 고성에 민수는 스마트폰을 귀에서 급히 뗐다.
“언젠 또 나가라며.”
- 좋은 말할 때, 빨리 기어들어 와라.
“중요한 일이 생겼어. 한 이주 정도 못 들어가.”
- 그래? 갑자기? 우리 아들 고생이 많네. 이번에도 5백?
나긋나긋한 목소리, 엄마의 변화무쌍한 모습에 민수는 어이가 없었다.
“엄마 하는 거 봐서.”
- 걱정되니까, 가끔 연락하고.
걱정은 무슨. 연락도 없이 보름 만에 집에 갔어도 태연하던 엄마의 모습은 잊을 수가 없었다. 전화를 끊은 민수는 메시지를 보고는 고개를 갸우뚱 저었다.
“에이, 아닐 거야.”
민수는 서둘러 전철역으로 뛰었다.
“여기 사는 자식이 뭐가 부족해서?”
한눈에 봐도 있는 놈들이 사는 고급아파트라는 게 느껴졌다. 삼성동 요지에 딱 한 동만 올라선 아파트 출입문엔 여러 대의 CCTV가 있었고 그 안쪽엔 경비원까지 서 있었다.
“스머프, 나보고 어쩌라고.”
운동복 차림, 거기에 신분증이 꽂혀있는 지갑도 없었다. 출입구를 통과한다 해도 경비원을 통과할 방법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찾을 수 없었다.
한 시간을 서성거렸다. 11시 49분까진 10분만 남았다.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남잔 깡다구여.”
깊게 숨을 내쉬고 출입구에 섰다. 경비원과 눈이 마주치고 민수는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지잉.
보안카드도 비밀번호도 모르는 자동문이 저절로 열렸다. 시간이 촉박해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출입구를 통과한 민수는 경비원을 향해 미소를 최대한 활짝 지으면서 천천히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었다.
‘뭐지?’
분명 어디를 가냐고 물어야할 경비원은 엉뚱한 곳만 바라보고 있었다. 출입문에 이어 카드식이 분명한 엘리베이터도 저절로 3층을 찍고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지만, 하도 골 때리는 일을 많이 경험해서인지 그러려니 넘겨 버렸다.
301호.
역시나 보안카드와 비밀번호를 입력해야만 열리는 문. 초인종을 눌렀지만, 안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5분도 채 남지 않은 상황.
철컹.
두꺼운 철문이 저절로 열렸다. 이젠 놀라지도 않았다.
띠링.
현관에 들어서려는 민수는 메시지에 멈칫했다.
<발생된 2번의 비용은 수당에서 공제됩니다.
성공수당 잔액 8,000,000원.>
“겨우 문 두 번 따주고 2백을 처먹어?”
분노에 부들부들 몸을 떨었지만, 남은 수당까지 놓칠 수는 없었다. 신발도 벗지 않고 안으로 뛰어 들어간 민수는 소파에 널브러진 사내를 보고 흠칫 놀랐다.
“정, 정말 최지환이라고?”
“누구···.”
서서히 고개를 돌리는 최지환의 눈은 완전히 풀려있었다. 소파 앞 테이블엔 작은 흰 통이 열려 있었고 그 주위로 알약들이 흩어져 있었다. 몸이 축 처진 최지환의 상태를 봐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했다.
“최지환 씨. 당신의 인생, 내가 잠시 빌려 쓰겠습니다.”
호기 있게 말은 뱉었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할지는 통 알 수 없었다.
“젠장! 나도 모르겠다.”
이상혁과 몸을 세게 부딪친 기억을 떠올린 민수는 최지환을 향해 그대로 몸을 날렸다.
“졸라 아프네.”
머리에 전해지는 고통보다 몽롱한 정신과 뒤집어질 것 같은 속이 문제였다. 자꾸 감기기만 하는 눈을 억지로 뜨곤 몸을 살폈다.
“화장실.”
축 처진 몸을 힘겹게 세우고는 머리를 흔들어 감기려는 눈꺼풀에 힘을 줬다. 집이 너무 넓었다. 어디가 어딘지 구분하기 힘든 민수에겐 화장실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마침 열린 방문으로 흐릿하게 보이는 침대가 보였다. 방에 딸린 화장실이 없다면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었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벽을 잡고 거의 기다시피 방 안에 들어간 민수의 눈에 다행히 화장실이 보였다. 마지막 힘을 짜내 변기 안으로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으로 목 깊숙이 찔러 넣었다.
우웩!
토악질과 함께 수십 알의 알약이 변기로 쏟아져 내렸다. 잘못하다간 같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손가락을 넣고 토하고를 수십 차례 반복했다. 더는 나올 게 없었는지 헛구역질만 했고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한 민수는 변기를 붙잡고 장렬히 눈을 감았다.
“스머프···. 이 개자식.”
속은 여전히 미식 거렸고 머리는 망치로 두들기는 것 같았다.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얼마동안 잠이 들었는지 시간관념까지 사라진 상태. 밀려드는 갈증에 천근만근인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우고는 세면대 수도꼭지에서 쏟아지는 물을 그대로 마셨다.
“달랑 8백만 원에 죽을 뻔 했네.”
갈증을 해소한 민수는 세면대 위의 거울에 얼굴을 비췄다.
최지환.
10대에 영화로 데뷔해 현재 톱을 달리는 배우. 영화 개런티는 7억 원, CF는 일 년에 20억 원이라는 소문만 돌 뿐, 그의 정확한 수입은 모른다. 스캔들도 없었고 잘생긴 외모에도 나대지 않고 겸손하다는 평가로 한국은 물론이고 일본과 중국의 팬 층은 두터웠다.
“그런데 왜?”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무소유를 대변하는 백수인 자신도 살기 위해 이렇게 바동거리는데, 다 가진 놈이 뭐가 부족해서 약을 처먹었는지, 배알이 꼴렸다.
“최지환 씨, 거 얘기 좀 합시다.”
재깍 반응하던 이상혁과 달리 최지환은 말이 없었다.
“있는 거 다 아니까, 서로 피곤하게 하지 말자고요.”
역시 대답은 없었다. 터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소파까지 가는 일은 너무도 힘들었다. 아무래도 아직 약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 같지 않았다. 시계는 저녁 11시를 가리켰다.
“꼬박 하루를 잔거야?”
민수는 주위를 둘러봤다. 벽과 바닥은 대리석으로 도배되었고 가구와 가전, 앉아 있는 소파까지도 평범한 사람이 사기엔 부담되는 것들이었다.
가슴을 손으로 눌렀다. 균형 잡힌 몸매에 근육까지, 거기에 잘생긴 얼굴, 돈, 그리고···.
잠시 최지환으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에 민수는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 너 누구야.
음흉한 생각을 읽어서인지 최지환이 처음으로 반응했다.
“거 있으면 진작 대답 좀 하시지.”
- 너 누구냐고 물었어. 그리고 지금 이건 무슨 상황이야?
“저보다 나이가 많으시니, 형님이라고 부르죠. 간단히 얘기하면 형님은 죽어선 안 될 사람이고, 형님을 원상회복시키기 위해 제가 잠시 형님의 인생을 대신 살아주는 겁니다.”
- 뭔, 개소리야.
“평소 이미지가 있으신데, 욕하고 그러시면 안 되죠.”
문제가 해결될 때까진 최지환이 할 수 있는 건, 고함을 치는 것밖에 없었다. 그것도 오로지 민수만 들을 수 있는. 민수는 최지환의 고함을 무시하고 제풀에 꺾일 때까지 기다렸다.
“이제 좀 안정이 되십니까?”
- 돌려줘.
최지환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건 저도 못 합니다. 문제가 해결되면 저절로 돌아가게 될 겁니다.”
- 이런 말도 안 되는.
“그러게 말입니다. 저나 형님이나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나저나 뭐가 부족해서 약을 처먹··· 아니, 드신 겁니까?”
- 네가 알아서 뭐하게. 알 필요 없어.
머리는 여전히 욱신거렸지만, 몸은 한결 나아졌다. 최지환이 이 상황을 받아들이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싫든 좋든 당분간은 제가 형님으로 살아야하니까, 집 좀 살펴보겠습니다.”
소파에서 일어난 민수는 거실과 주방부터 살폈다. 대충 훑어봐도 최소 80평은 넘어 보일 것 같았다. 문 하나를 열 때마다 민수의 벌린 입은 더욱 벌려졌다. 화려함의 극치. 죽었다 깨어나도 두 번 다시 이런 집에선 살아보기 힘들 것 같았다.
“우와! 우와! 대박입니다요. 형님.”
마지막 문을 연 곳은 옷 방. 물 건너온 양복과 와이셔츠는 물론이고 평상복, 시계, 선글라스, 목걸이 등이 각을 맞춰 정리돼 있었다. 그리고 유리 장식장 위에 놓인 스마트키 하나를 조심스럽게 들었다.
“벤츠?”
원을 삼등분하는 마크, 분명 벤츠였다. 이상혁을 살리기 위해 몸으로 때웠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풍요로운 삶.
“스머프야. 고맙다.”
한참을 웃던 민수가 웃음을 멈췄다. 그런데 이 불안함은 뭐지? 옷 방까지 확인한 민수는 불안한 표정으로 소파에 던져진 지갑을 열었다. 신분증과 운전면허증, 그리고 신용카드와 여러 장의 VIP 카드. 그러나 현금은 없었다. 민수는 깊게 한숨을 내쉬고는 최지환을 찾았다.
“형님, 계십니까?”
대답이 없었다.
“형님, 저도 이거 좋아서 하는 일 아닙니다. 제가 일을 빨리 끝마쳐야 형님도 원래의 삶으로 돌아올 수 있는 거고요. 꼭 필요할 때만 쓰겠습니다. 그러니 카드 비밀번호 좀···.”
역시 대답은 없었다. 처음 보는 놈에게 곳간 열쇠를 맡길 사람은 없었다.
“형님 맘대로 하쇼. 일 년이 걸리던 십 년이 걸리던 난 상관 안 할 랍니다. 막말로 죽을 생각을 한 사람이 돈이 뭐가 아까 워요? 내가 써봐야 얼마나 쓴다고.”
엄마의 잔소리를 피해 최지환으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최지환 정도라면 한창 주가를 올리는 여배우와 여자 아이돌과의 로맨스는 어쩌면 당연한 수순일지도. 생각을 읽었는지 최지환의 목소리가 들렸다.
- 돈은 안 아까워. 원래로 돌아가려면 얼마나 걸리지?
“지난번엔 보름 정도 걸렸는데, 정확한 것은 저도 잘 모릅니다.”
- 보름. 카드 비밀번호는 모두 0903, 한도는 없으니까 너 알아서 써.
“형님! 사랑합니다.”
기쁨에 쾌재를 부르는 사이 누가 방으로 들어온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형! 왜 전화는 안 받아!”
민수는 낯선 이의 방문에 얼음이 되었다.
“누구?”
“지금 장난해!”
씩씩거리는 사내, 영문을 몰라 갸우뚱거리는 민수. 머리는 다시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이거 봐! 50통 넘게 부재자 전화 찍혔잖아.”
“아니, 그게 아니라.”
“이게 뭐야! 형 또 약 먹고 잔거야?”
테이블에 쏟아진 알약을 치운다는 걸 깜빡했다. 무음인 스마트폰엔 50통이 훨씬 넘는 부재중 통화가 걸려와 있었다. 약을 서둘러 치우는 사내, 대충 매니저란 생각이 들었다.
“하도 잠이 안 와서 말이지.”
“형하고 연락 안 된다고, 김 사장 난리 났어. 내가 중간에서 얼마나 깨졌는지 알아?”
“뭐, 그건 내가 미안하지만.”
“몰골은 또 이게 뭐냐고? 내일 CF 찍는 거 또 잊었어?”
CF?
내가?
배우가 CF를 찍는 건 당연했고 최지환의 수입은 영화보단 CF가 컸다. TV만 틀면 나오는 최지환이 찍은 CF. 여성을 유혹하는 강렬한 눈빛, 야성미를 자랑하는 시크함. 민수는 솟는 닭살을 털기 위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니 솔직히 CF를 찍을 자신이 없었다.
“내가 몸이 좀 안 좋은데···, 3주 후 정도에 찍으면···.”
“형 미쳤어? 벌써 두 번이나 연기했잖아. 이번에도 연기하면 위약금 줘야 한다고.”
“위약금은 얼마나?”
“대충 40억.”
“4, 40억?”
다리에 힘이 풀린 민수는 억 소리와 함께 소파 위로 쓰러졌다. 달랑 8백만 원을 벌려다 쪽박 차게 생긴 현실에 절망했다. CF, 이건 깡다구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배우가 영화, 드라마, CF를 찍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을 왜 하지 못했을까, 자책 해봐도 버스는 이미 떠나버렸다.
“내일 아침 촬영장에 가야 하니까, 형은 들어가 잠이라도 자.”
“그럼 댁은?”
“자꾸 헛소리 할 거야? 난 당연히 형 지켜야지.”
졸지에 배우가 된 민수는 떠밀리다시피 방에 감금 아닌 감금을 당했다. 이 위기일발의 상황, 도망칠 곳도 보이지 않는 방에서 믿을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형님, CF를 찍으랍니다.”
- 이제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왜요? 제가 형님의 목숨을 구했잖습니까?”
- 살려달라고 한 적 없어.
죽을 결심을 했다면 세상과의 모든 인연을 끊었다는 뜻. 차분한 최지환의 목소리에선 삶의 의지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내일 상황은 안 봐도 비디오, 최지환을 설득해 도움을 받는 방법 외엔 답이 없었지만,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호랑이는 가죽,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고 하지 않습니까? 형님이 지금까지 쌓은 명성과 이미지, 제가 똥칠 한방으로 날려도 됩니까? 아, 이 배우 정말 아까운 배우야, 죽을 때 죽더라도 이런 소린 들어야죠.”
최지환은 또 다시 대답이 없었다. 몸은 욱신거렸고 머리는 여전히 깨질 것처럼 아팠다.
“좋습니다. 내 더러워서 찍습니다. 형님에게 지울 수 없는 흑역사를 선물해 드리죠.”
고민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었다. 큰 침대에 대자로 누운 민수는 억지로라도 잠을 청했다.
***
S63 AMG 4M.
최소 2억은 줘야 살 수 있는 차. 주차장으로 퍼지는 놈의 아우라에 민수는 마른침을 삼켰다. 떨리는 손으로 스마트키를 매만지고는 운전석 문을 가볍게 열었다.
“뭐해? 뒤에 앉아.”
“운전은 내가.”
“이 형이 평소답지 않게 왜 이래? 시간 없어, 빨리 뒷좌석에 타.”
“내 차잖아. 한 번만.”
절대 운전을 포기할 수 없었다. 잘빠진 이 녀석을 포기하느니 CF를 안 찍겠단 각오로 운전석 문을 틀어잡고 사정했다.
“형, 솔직히 나 이 차 운전하는 재미로 출근한다. 김 사장은 개지랄 해, 형이 싼 똥 치워. 유일한 내 낙까지 뺏겠다는 거야, 지금?”
“아니, 그게 아니고.”
“시간 없다고 했잖아. 빨리 뒤에 타.”
애교도 통하지 않는 놈의 강력한 수비에 결국 운전석을 뺏기고 말았다. 씨알도 안 먹히는 이 무지막지한 놈의 정체부터 알아야했다. 매니저인 건 확실했고, 최소 이름은 알고 지내는 게 두루두루 편할 것 같았다.
“운전면허증 좀 주세··· 아니, 줘봐.”
“내 운전면허증?”
“그래.”
“내 운전실력 못 믿어? 걱정 붙들어 매고 잠이나 자.”
아, 자식 말 많네. 어쩌면 최지환이 자살하려는 이유가 이 녀석 때문일 수도. 이럴 땐 강하게 나가야 한다.
“뭐가 이렇게 말이 많아! 잔말 말고 주기나 해.”
“알았어. 주면 되잖아.”
반강제로 뺏은 지갑에서 운전면허증을 유심히 살폈다.
이름은 정태균, 나이는 30세.
‘젠장, 나보다 세 살이나 많네.’
최지환의 몸을 쓰는 이상, 형이라는 호칭은 어쩔 수 없었다.
‘엥?’
민수는 지갑 사이에 꽂힌 낯익은 마크를 바라봤다. 청룡이 바다에 둥실 둥실 떠 있는 마크.
“혹시 해병 2사단 출신?”
“형이 그걸 어떻게 알아?”
“혹시나 해서 물어 본 거야. 몇 긴데?”
“나? 1049기.”
무의식적으로 튀어 나오는 필승이란 구호를 막기 위해 민수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민수의 기수는 1136기, 거기에 같은 해병 2사단 직속 선배. 이 사실은 혼자만의 비밀로 남겨 놓는 게 좋을 것 같았다.
***
“컷! 다시 갑시다.”
촬영장의 분위기는 예상대로 개판. 감독은 대놓고 말은 못하고 애꿎은 정태균만 쥐 잡듯 했다.
“야. 지금 두 시간째 한 컷도 못 찍었어. 갑자기 왜 저러는 거야?”
“사실 형이 어제 잠을 한숨도 못 잤어요.”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혹시 계약조건에 불만이 있어서 그러는 거야?”
“그건 절대 아니에요. 30분만 쉬었다 가면 안 될까요?”
제일 죽을 맛인 사람은 민수였다. 우수에 젖은 그윽한 눈빛, 여성의 마음을 유혹하는 몸짓과 미소, 도대체 뭘 어쩌라는 건데. 나름 최선을 다해 카메라를 응시하고 미소를 지을 때마다 감독과 스태프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다섯 놈에 두들겨 맞았을 때보다 몇 배는 더 큰 고통이 민수를 괴롭혔다.
“형, 감독님하고는 내가 얘기할 테니까, 여기서 좀 쉬다 나와요.”
“어. 나도 미치겠다.”
“두 시간이면 찍고도 남을 시간인데, 형 자꾸 왜 이래?”
“그걸 내가 알면 이러고 있겠냐.”
최지환을 위해 마련된 방에 들어가서는 그대로 소파에 대자로 뻗었다. 무대에 선 경험은 유치원 재롱잔치가 전부. 그것도 대사를 못 외어 나무 복장을 뒤집어쓰고 서 있는 역할이 전부였다. 그런 민수에게 CF는 펄펄 끓는 용암에 몸이 타 들어가는 극강의 고통을 선사했다.
- 넌 연애한 적 없어?
사라졌던 최지환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지만, 눈을 뜰힘조차 없어 별로 반갑지 않았다.
“백수가 뭔 연애랍니까?”
- 대학 다닐 때도?
“도와 줄 거 아니면 귀찮게 하지 좀 마요.”
만사가 귀찮았다. 지금 죽기 일보직전인 사람은 최지환이 아닌 민수 자신이었다.
- 이 CF가 끝나면 다른 스케줄은 없어.
“진짜 똥칠을 하니까 똥줄이 탑니까?”
민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CF, 영화, 드라마, 해외 팬 미팅까지 아는 것만으로도 최지환은 쉴 틈이 없었다. 그런데 스케줄이 없다니. 이 CF만 잘 넘기면 S63 AMG 4M를 타고 거리를 누빌 수 있다는 말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론 최지환의 자살이 즉흥적인 행동이 아니란 말이 된다. 뭔가가 있는데 뭔가가 영 잡히질 않았다.
- 카메라를 보면 사각형의 틀 안에 렌즈가 보일 거야. 그 렌즈 주위를 초점을 잡지 말고 그냥 묵묵히 바라봐. 힘을 쫙 뺀 상태로 움직이지도 말고 뭘 하려고 하지도 말고, 그냥 묵묵히.
“뭔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 그 정도면 급한 불은 끌 수 있을 거야.
30분이란 시간은 너무나 짧았다. 다시 악몽이 시작된다는 생각만으로도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지환 씨, 이번엔 한 번에 가자고. 나도 죽겠어. 흉내만 내 줘, 나머진 내가 CG로 쫙쫙 뽑을 테니까.”
“노력하겠습니다.”
“자자, 스탠바이.”
최지환이라는 명성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감독은 화를 꾹 누르고는 카메라 뒤 의자에 앉았다.
“레디, 고.”
불빛 주위를 흐릿하게, 그리고 묵묵히. 속으로 이 말을 수십 번 외치고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숨을 고르고는 힘을 완전히 빼고 멍한 표정으로 렌즈를 바라봤다. 엄마 지갑에 손을 댔다 야구방망이로 얻어터진 슬픈 과거까지 들춰내며 민수는 최지환의 말대로 그저 묵묵히 렌즈만 바라봤다.
“컷! 오케이.”
오케이가 천상에서 들리는 천사의 나팔소리 같았다. 분위기를 봐선 그리 나빠 보이진 않았다.
“지환 씨, 이리 와서 한 번 볼래요?”
내가 뭘 볼 줄 알아야 보지. 민수는 어색한 미소를 짓고는 감독이 부르는 곳으로 가 화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리고 놀랬다.
‘이걸 내가?’
그저 힘 빼고 묵묵히 렌즈를 바라봤을 뿐인데 찍힌 영상은 정말 기가 막혔다. 이래서 원판이 중요하다는 걸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지환 씨, 사람 놀라게 하지 말고 이렇게 가자고. 응?”
순조롭게 가진 않았지만, 순간순간 비유를 들어 설명하는 최지환 덕에 해는 넘기지 않고 촬영을 끝낼 수 있었다. 연기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스태프의 수군거림은 한 귀로 듣고 흘렸다.
‘이젠 자유다. 흐흐흐.’
최지환의 원상회복은 잠시 미루고 S63 AMG 4M와 함께 자유를 만끽할 생각에 민수는 주먹 쥔 두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
최지환이 소속된 기린 엔터테인먼트 사장실에 끌려 나온 건 차를 억지로 몰고 온 정태균의 모략 때문이었다.
“지환아, 하나만 골라봐 응?”
민수는 스케줄이 없다는 최지환의 말을 떠올리고 강력하게 버텼다.
“나도 좀 휴식이 필요하다고요.”
“영화 하나 찍고 휴식해. 달나라 빼곤 내가 책임지고 다 보내 줄게.”
누가 찍기 싫어서 안 찍냐고. CF 하나 찍는 것도 하루 종일 고생 했는데, 영화는 생각하기도 싫었다. 자고로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사는 게 정답이었다.
“여태껏 쉬지도 못하고 달렸다고요.”
“달리는 거 중단하면 병 나. 그러니 계속 달려.”
“패 죽여도 못 달리겠다고요.”
“그럼 한번 패볼까?”
도대체 말이 통하지 않는 인간이었다. 정태균이 아니라 어쩌면 김 사장 이 인간 때문에 자살을 결심했을 수도.
“좌우지간 난 쉴래요.”
“좋아. 그럼 딱 한 달만 쉬면서 여기서 하나 골라. 야, 막말로 너니까 내가 이러지, 다른 놈 같으면 쳐다보지도 않는다.”
민수의 손엔 다섯 권의 영화 시나리오가 반강제로 건네졌다. 한 달이면 원래의 몸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얄팍한 계산이 선 행동이기도 했다. 그게 도끼로 자신의 발등을 찍는 일이 될 줄은 민수는 알지 못했다.
“오빠, 오랜만.”
“누구?”
사장실을 나선 민수는 묘령의 여자 앞에 또 다시 얼음이 되었다.
“한, 한민지?”
“뭘 그렇게 놀래?”
예수님, 부처님, 공자님, 여기서 한민지를 만나다니, 감사합니다. 심장은 걷잡을 수 없이 뛰었다. 청순한 이미지의 여배우 한민지, 매일 밤 민수의 판타지를 완성시키는 여주인공.
“오빠, 또 전화번호 바꿨더라.”
“내가 그런 실례를?”
“참, 오빠가 영화를 선택해야 나도 캐스팅되니까, 이번엔 좀 같이 찍자.”
민수는 손에 들린 시나리오를 바라봤다. 만약 여기서 하나 고른다면 한민지와 같이 영화를 찍게 된다. 비록 발연기지만, 한민지와 같이만 있을 수 있다면 욕을 바가지로 먹어도 여한이 없다.
“오빠, 난 개인적으로 이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더라.”
다섯 권 중에 한 권을 빼고는 환하게 웃는 한민지. 그녀의 웃음에 지금까지의 고생은 훌훌 털어버릴 수 있었다. 그래, 난 지금 최지환이야. 여자들이 뻑가는 최지환이라고. 민수는 최대한 목소리를 깔았다.
“언제 밥이라도 같이 먹을까?”
“뭐? 밥?”
“내가 뭐 실수라도?”
“아니, 나야 좋지. 목석같은 오빠가 웬일이래?”
최지환이 목석?
어쩌면 문제의 시작은 여기부터 일지도. 민수는 한민지가 고른 시나리오를 애지중지 가슴에 품고 사무실을 빠져 나왔다.
“형님, 게이십니까?”
여전히 대답이 없다.
“뭐, 이 사실이 알려지면 매장되는 건 일도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자살할 필요까지는 없잖아요. 막말로 은퇴하고 성 정체성을 찾아 이민을 갈 수도 있는 거고.”
민수의 열변에도 최지환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목석.
한민지 정도에도 꿈쩍이지 않는 남자는 없다는 게 민수의 확신이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 최지환은 게이다. 샤워를 하던 민수를 머리를 숙여 아래를 바라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이 씨, 난 아니야. 절대 아니야.”
최지환의 몸을 쓴다고 해서 성 정체성까지 같아야 된다는 법은 없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손으로 거품을 만들어 분신을 움켜쥐었다. 다행히 반응은 있었다. 그것도 엄청난 반응이, 그걸 바라보는 민수는 모든 게 부러울 뿐이었다.
‘만약 진짜 이게 원인이면?’
생각만으로도 몸이 부르르 떨렸다. 타인의 성 정체성을 가지고 왈가불가할 일은 아니지만, 쉽게 해결할 문제 또한 아니었다.
“오, 죽이네. 내가 언제 이런 걸 몰아보겠냐고?”
부드러운 핸들의 그립감, 공기의 흐름을 역행하는 스피드, 항공기 일등석을 방불케 하는 럭셔리한 실내. 이래서 벤츠, 벤츠 하나보다.
최지환의 성 정체성 문제는 잠시 잊기로 했다.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는 것보단 최지환의 인생을 즐겨보는 나쁘지 않을 수도.
쫓아오겠다는 정태균을 반강제적으로 퇴근시키고 S63 AMG 4M를 몰고 찾은 곳은 청담동의 한 카페. 3대 연예기획사가 있는 곳으로 평소에도 연예인들이 자주 찾는 카페로 소문난 곳이지만, 백수의 몰골로는 절대 찾을 수 없는 곳이기도 했다. 애지중지 차를 주차하고 카페로 들어서는 민수에게 수많은 시선들이 꽂혔다. 지금 필요한 것은 연예인답게, 시크하게.
“아메리카노 한잔 주세요.”
“네? 네. 네.”
그리고 중요한 건 살짝 미소를 보여주는 센스. 커피를 내리는 여직원이나 카페 안의 모든 여자의 시선은 커피를 기다리는 최지환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쏠렸다. 특급 연예인이면서도 우월한 기럭지와 탄탄한 몸매, 거기에 안드로메다 급의 상판대기까지,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여, 여기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살짝 고개를 숙이고 가벼운 미소는 서비스. 얼굴까지 붉어진 여직원을 따가운 시선을 뒤로 하고 연예기획사 출입구가 훤히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경박스럽지 않게 최대한 천천히, 커피를 한 모금 입으로 넘겼다.
“정말 최지환 맞지?”
“보면 몰라?”
“그런데 여긴 왜?”
“내가 그럴 어떻게 알아?”
뒤에서 들리는 웅성거림, 찰칵거리는 카메라 소리, 민수는 이 시간을 최대한 즐기고 싶었다. 결코 뒤를 돌아보는 천박한 짓은 하지 않는다. 최지환도 그랬을 거니까.
“저···.”
목소리를 쫓아 뒤를 돌아본 민수는 어색한 미소를 보였다.
주위에 예쁘고 귀엽고 섹시한 여자도 많은데 왜 하필···.
“무슨 일이시죠?”
“저, 사인 좀 해주세요.”
사인?
민수는 마른침을 삼켰다. 비록 최지환의 인생을 대신 산다고는 하지만, 필체까지 흉내 낼 순 없었다. 그리고 최지환의 사인은 본 적도 없었다. 종이와 펜을 내미는 여자의 얼굴을 다시 바라 본 민수는 공포영화의 여주인공이 생각나 몸을 가볍게 떨었다. 여기서 머뭇거리면 싸가지 없는 연예인으로 인터넷을 도배할 건 불 보듯 뻔했다. 지금 필요한 건 스피드.
“제가 팔을 다쳐서 사인은 좀 힘듭니다.”
“아, 그래요?”
실망한 표정, 자리에 돌아가면 악플을 달겠지? 최지환의 인생을 꼬이게 할 순 없었다.
“저, 사인대신 사진은 어떠세요?”
“어머, 어머. 당연 좋지요.”
간사한 것 같으니라고, 어디서 얼굴을 비벼대는 거냐? 거대한 얼굴이 훅 들어와 피할 틈도 없이 뺨을 내주고 말았다.
“한 장만 더요.”
‘니 맘대로 하세요.’
그렇게 다섯 장을 찍은 후에야 공포영화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건 잠시였다.
“저하고도 사진 좀.”
스마트폰을 쥐고 찾아 온 또 다른 여성, 그리고 그 뒤로 줄을 서는 사람들. 그렇게 30분을 시달리고서야 민수는 카페를 나올 수 있었다. 카페를 찾은 건 실수였다. 물이 좋다는 소문만 듣고 찾았지만, 오늘은 청정지역이 아니었다.
“병신, 사인도 생각 못했냐?”
주위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고갤 쳐들고 다니려던 계획은 사인이라는 복병을 만나 꼬여버렸다. 사인을 완벽히 복제하기 전에 거리를 활보하는 건 무리, 민수는 차를 집으로 몰았다.
띠링.
한 통의 문자.
<어디냐?>
차를 도로 옆에 정차한 민수는 메시지의 주인공을 찾아 손을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찾아낸 이름 송준호. 동갑으로 어쩌면 영화판의 경쟁자일 수도 있지만, 둘이 절친 사이인 건 소문을 통해 알고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미혼에 스캔들 한 번 없는 깨끗한 사생활의 보유자들이었다.
“잉? 혹시 둘이?”
민수는 엉덩이에 힘을 줘 닫아버렸다.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그렇다고 최지환으로 언제까지 살 수는 없었다. 정신일도 하사불성, 호랑이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살 수 있다는 깡다구로 민수는 문자를 날렸다.
<청담동.>
<낮술이나 한잔 할까?>
<나쁘진 않네.>
<여기로 와라.>
<여기가 어딘데?>
<인마, 집이지. 어디야?>
문자를 찍는 민수의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렸다. 미치지 않고선 남자 둘이 집에서 술을 마실 리는 없다. 최지환의 성 정체성, 추측은 점점 확신으로 굳어졌다. 역시나 내비게이션 즐겨찾기엔 송준호의 이름이 저장돼 있었다. 호흡을 가다듬은 민수는 혁대를 끝까지 조여매고 운전대를 잡았다.
“형님, 오늘 송준호 뒈지는 날입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최지환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어쩌면 송준호와의 관계를 숨기기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민수는 빠르게 차를 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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